작성일 : 20-02-27 16:50
명심보감 공부 27차시
 글쓴이 : 최고관리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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◐ 時來風送?王閣이요 運退雷轟薦福碑라
▷ “때가 오면 바람이 (우연하게) 등왕각으로 보내 주게 되고, 운이 물러가면 벼락이 천복비를 깨뜨린다.”
<한자학습>
風(바람 풍), 送(보낼 송),  ?(나라 이름 등), 閣(집 각), 運(운수 운), 退(물러갈 퇴), 雷(우레 뢰), 轟(울릴 굉), 薦(천거할 천), 碑(비석 비)
 <보충학습>
1. 등왕각(?王閣) : 중국 당대(當代)에 남창(南昌) 부근에 있던 유명한 누각. 당시 그곳의 도독(覩督)인 염백서(閻伯嶼)는 등왕각을 낙성하는 날 자기 사위로 하여금 서문을 짓게 할 예정이었다. 한편 당시 14세이던 왕발(王勃)은 꿈에서 빨리 남창으로 와서 글을 지으라는 신령의 현몽을 얻었다. 깨어 보니 낙성식이 바로 다음 날이었다. 다행히 순풍이 불어서 하룻밤 사이에 칠백리 길을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고, 왕발은「등왕각서」라는 명문장으로 천하에 문명(文名)을 떨칠 수 있었다.
2. 천복비(薦福碑) : 중국 송대(宋代)에 강서성(江西省) 천복사(薦福寺)에 있던 비석. 이북해(李北海)가 지은 글을 구양순(歐陽詢)이 옮겨 쓴 유명한 비석이었다. 범중엄(笵仲淹)이 이 고을을 다스릴 때 백성에게 세금을 걷으려고 하였는데, 밤사이에 벼락으로 비석이 깨져버렸으므로, 이에 세금 거두기를 중지하였다고 한다. 일설에는 구래공(寇萊公)의 문객(門客) 중에 한 사람이 매우 가난하였는데, 명분 없이 도와줄 수가 없었다. 이에 천복비의 비문을 탁본해오면 후한 상을 준다고 하여 그 문객이 천신만고하여 수 천리를 애써 갔더니, 그날 밤에 벼락이 내려 비석이 깨져버렸다고 한다.
 <삶의 교훈>
◇ 운명에는 필연성(必然性)과 당위성(當爲性)이 있다고 했다.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려다가 도리어 하늘의 뜻에 거역(拒逆)을 받아 화(禍)를 당하기도 하고, 하려는 마음은 없었음에도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 도리어 복(福)을 받기도 한다. 이것을 운이라 할진데 자기에게 주어진 운을 순순히 받아야 된다. 왕발처럼 운이 있으면 순풍을 타고 먼 길을 가서 등왕각서문을 지을 수 있을 것이고, 구래공처럼 운이 없으면 천복비 탁본을 위해 천신만고 끝에 그곳에 도착했지만 갑작스럽게 벼락이 쳐서 비석이 넘어져버려 결국 헛수고를 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운이란 묘한 것이어서 억지로 거스를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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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{명심보감}은 우리 선조들이 초급 제2과정으로 널리 익혔던 교재다. {명심보감(明心寶鑑)}은 글자 그대로 [마음을 밝혀서 거울로 삼아야 할 보배로운 교재]라는 뜻에서 보이듯이 구절구절이 심성과 행동거지에 주의해야 할 인성교육의 요체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.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{명심보감}을 이른바 <초급 승진과정 교재>로 읽기를 권장했다. 율곡 이이(李 珥) 선생은 명심보감의 내용을 높이 칭찬하면서 서문(序文)과 발문(跋文)을 이어서 썼고, 영조대왕께서도 친히 어제서문(御製序文)을 써서 널리 읽기를 권장했던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때 {명심보감}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.
  한 때 {명심보감}의 저자를 중국인으로 잘못 알려진 문헌이 있었으나, 최근 속속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고려말 때 우리의 선현인 [추적(秋適) 선생]으로 알려진다. [추적(秋適)] 원본(혹은 진본이라고 함)이후 증보본이 많이 나와 시대가 요구하는 내용을 학동들에게 익히게 했다. {명심보감}의 발간은 '청주본'이 비교적 정본(正本)이자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바, 지금 전해지는 20편보다 편수가 훨씬 적었다.
  본란에서 {명심보감}을 알기쉽게 풀이한 [원문. 해설. 삶의 교훈]을 일주일에 한 편씩 싣는 이 한 구절만이라도 바르게 익힌다면 한자한문공부는 물론 인성교육의 측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. 특히 [삶의 교훈]은 많은 이들의 뜨거운 격려로 이어져 관리자가 특히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다. 읽는 이들의 뜨거운 격려와 성원으로 이어지길 바란다.